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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청각자료실 [1049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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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날짜 : 2015-09-2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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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저작권 문제로 해당 동영상은 웹서비를 하지 않습니다. 대신 동영상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제공합니다.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시고 자세한 사항은 아산리더십연구원으로 문의바랍니다.>
(00:00:00~00:01:30)
1. 프로그램 소개
(00:01:30~00:09:30)
2. 왕자의 난
· 3월 14일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이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격 배정되면서 시작됨.
· 정몽헌 회장이 해외출장을 나간 사이에 정몽구 회장 측이 현대증권의 이익치 회장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 자리를 정몽구 회장 계열이었던 노정익을 사장으로 승진, 발령한 것.
· 발령 소식을 듣고 이익치 회장이 귀국하면서 사태가 급진전됨.
· 24일 정몽헌 회장이 귀국한 뒤, 오후에 그룹구조조정 위원회를 통해 “구조조정본부의 공식발표가 없었으므로 현직을 그대로 유지하되 정몽구 회장께서는 현대자동차경영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회장직을 면한다”라고 발표함.
· 정몽구 회장 측은 대책을 수립하고 기자회견을 가짐. “그룹경영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주영의 재가를 받았다. 또한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직에 정몽구 회장을 면하게 한 것은 잘못된 발표이다. 지난 3월 24일자로 발표된 발표를 26일자로 취소한다.”라며 정주영 명예회장의 친필 싸인까지 공개함.
· 4시간 뒤 정몽헌 회장 측이 기자회견을 열고 반격에 나섬.
· 정주영은 여론이 악화되자 본사에서 경영자협의회를 열었음.
· “경영자협의회의장은 정몽헌 단독으로 한다”라는 발표를 통해 사태는 일단락됨.
(00:09:30~00:11:08)
3. 정주영일가의 지분
· 정주영은 현대그룹에서 아직도 왕 회장이라고 불리며 영향권을 행사함.
· 정주영 일가가 소유한 현대계열사 지분은 모두 합해서 5.4% 수준임.
· 낮은 지분에도 불구하고 의결권은 정씨일가가 장악하고 있음.
· 특히 왕자의 난의 발단이 되었던 현대증권의 경우에는 정주영일가의 개인지분이 한 주도 없었음.
(00:11:08~00:20:35)
4. 경영권 세습
· 대기업들은 기업들의 경영권을 자식에게 다 넘겨줌.
· 경영능력의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총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단기간 내에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게 됨.
· 현대의 경우엔, 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았던 정세영 회장은 결국 정몽구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게 됨.
·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퇴진이 자의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도중에 눈물을 흘림.
· 30년 동안 온 몸을 바쳐 키워온 현대자동차를 조카에게 넘겨주고 현대산업개발로 옮겨 분가함. 정몽구회장 체계로 바뀌면서 정세영 회장의 인맥들이 현대산업개발로 옮기거나 현대를 떠나게 됨.
·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주식회사 현대백화점은 대표적인 가족경영체제였음.
· 정몽근은 회장을 맡고 부인은 상무이사를 맡음.
· 상무이사였던 부인은 매일 이태리나 프랑스 등으로 패션쇼 구경하기 바빴음.
· 거의 매년 수억원대 적자가 났음.
· 이러한 족벌경영은 현대뿐만이 아님. 엘지그룹의 장자인 구본무 회장, 삼성의 이병철회장 등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족벌경영을 함.
(00:20:35~00:25:09)
5. 전문경영인들의 계파싸움
· 정몽구 회장 측근인 MK계열과 정몽헌 회장을 따르는 MH계열 전문경영인들의 싸움이 벌어짐.
· MK계열로는 박세용, 이계안, 정순원. MH계열로는 이익치, 김윤규, 김재수로 나눠짐
· 박세용 회장은 명예회장의 신임이 각별하여 그룹 내 영향력이 컸었음. 중립적인 인물로 알려졌지만 정몽구 회장측의 호텔회의에 참석하는 바람에 언론에 의해 MK계열로 불려짐.
· 이계안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고등학교 동문.
· 정순원 부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고등학교 후배.
(00:25:09~00:26:09)
6. 주가조작사건
· 정몽헌과 같이 출두했던 이익치 회장은, 자신이 책임을 지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음.
· 이 사건으로 정주영과 정몽헌 회장의 이익치에 대한 신임이 깊어짐.
(00:26:09~00:30:07)
7. 정주영 대선출마 및 족벌경영의 한계
· 국민당을 창당하고 92년 대선에 출마함.
· 자신이 총수로 있던 현대그룹계열사를 통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여 선거판에 쏟아부음.
· 그러나 대선 끝난 직후 정주영을 대신해 비자금조성혐의로 구속된 것은 전문경영인들이었음.
· 그 중 박세용 회장은 80년에 정주영과 함께 해외공사 수주를 나섰다가 리베이트문제로 옥고를 치룬데 이어 다시 비자금 문제로 구속됨.
· 박세용은 현대건설 공채1기로 입사하여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려와 99년 그룹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음. 99년 현대자동차 대표회장으로 전보된 후 5일 후 인천제철 회장으로 자리를 옮김.
· 그는 총수의 말 한마디로 자리를 이리저리로 옮겨야 했음.
· 이런 인사는 족벌경영 체제에서 전문경영관리인이 갖는 한계를 보여줌. 모든 인사권이 한 사람한테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전문경영인이라도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음.
· 같은 맥락으로 정순원 부사장은 고교 선배인 정몽구 눈에 들어 자동차 기획실장으로 발탁됨.
· 정순원은 기업체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고 학계나 연구소 쪽에서 책을 쓰던 사람이었음. 그런 사람이 중요한 부분을 총괄하는 자리를 맡고 있음.
(00:30:07~00:34:25)
8. 현대의 부도위기
· 대우그룹의 침몰로 재벌그룹도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만들어줌.
· 현대는 IMF때도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공격적 경영을 해옴.
· 일각에서는 대우 다음에 현대라는 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함.
· 대우문제의 파급효과를 분석한 연구보고서는 외국계 은행들이 이미 현대그룹에 여신을 중단했다는 것을 발표함. 당시에 과중한 부채가 문제였음.
· 동시에 현대그룹계열사에 대한 외국인투자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 발생.
· 위기를 느낀 현대는 부채를 200%이하로 줄이는 등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함.
· 전문가들은 현대가 실질적인 구조조정을 미룬 채 증자로만 부채조정을 해결하려고 했다고 비판함.
· 이러한 행태는 소액주주의 저항을 불러왔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이탈을 불러옴. 또한 신용평가등급이 IMF때보다 더 낮아지게 됨으로써 기업가치가 하락함.
· 그런 위기 가운데 터져 나온 것이 주가조작사건임.
· 주가조작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불똥이 최고경영자에게 튀지 않도록 변호사들과 실무자들이 책임을 떠안는 방안까지 논의했음.
(00:34:25~00:39:05)
9. 소액주주들의 분노
· 이러한 현대의 행태로 소액주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함.
· 주주총회에서 현대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현대직원들에게 끌려 총회장 밖으로 쫓겨남.
· 주주로 주주총회에 갔다가 봉변을 당한 이들은 현대건설 김운규 사장을 고발함.
· 그 날 주주총회장에서 끌려나오면서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음.
· 이들은 재벌가의 경영권 싸움에 언제까지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봐야하냐며 분통을 터트림.
(00:39:05~00:42:20)
10. 현대의 대응
· 이런 모든 사태에 대한 현대의 반응은, 다 지나간 일이라며 묻어버림으로써 사태를 일면하려는 모습을 보임. 진정으로 변화하고자하는 움직임은 찾기 어려움.
· 정몽헌의 기자회견에서 “이사회중심의 선진국형 지배구조를 정착시키고 주주들의 의견이 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제도와 경영방식을 정립하겠으며 주주는 단지 보유지분만큼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제도를 정착하는 지배구조를 실천해나가겠다”고 발표함.
· 그러나 계열사가 독립 경영한다고 해놓고 특정계열사에 대한 경영전략을 그룹의 회장자격에서 발표했다는 것은 모순된 내용임.
(00:42:20~00:44:53)
11. 정주영의 발언
· 소떼방북과 금강산 개발을 통해 정주영은 사업가로서의 특유의 추진력과 뚝심을 보여줌.
· 1세대 경영인인 그는 21세기를 맞으면서 새로운 도전을 맞음. 새로운 시대가 그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음.
· 그러나 경영자협의회에서 발표한 그의 말 한마디는 재벌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분명하게 드러냄.
· 정주영 “경영자협의회회장은 정몽헌 단독으로 한다. 그 배후에는 제가 있기 때문에 저하고 다 의논할 것이니까 아무 걱정 안해도 된다”
· 이 발언을 통해 정주영은 여전히 현대그룹의 명예회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설명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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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날짜 : 2015-09-2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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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00:00:00~00:05:30)
1. “한강의 기적을 이끌다”
· 세계는 한국 경제발전을 개도국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로 평가함.
· 정주영은 중공업 분야를 크게 성장시킴으로써 국가기간산업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함.
·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경제발전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외시장을 개척함.
· 사회간접자본시설투자를 바탕으로 삼아 해외건설시장 개척에 나섰고 조선공업을 일으켜 수출산업을 앞당겼으며 자동차공업의 활로를 개척함.
· 한국 경제발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수출 산업 중 약 70%가 중화학제품.
· 현대는 20만명의 종업원. 62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으며 연간 매출 81조원이며 226달러의 수출액을 벌어들임.
· 현대는 한국 기업 중 가장 국가기여도가 큰 기업
· 자동차는 190여개로 수출되었고 각종 대형선박과 건축물들은 세계인들의 감탄을 받음.
· 아산복지재단을 만들어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임.
· 올림픽위원장으로서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함.
(00:05:30~00:07:30)
2. “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”
·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8남매 중 맏이로 출생.
·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부지런했고 정주영도 부지런함을 물려받음.
· 가난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일념으로 집을 나섰고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쌀가게 점원으로 취직.
· 4년 만에 쌀가게 주인의 신뢰를 받아 신용 하나만으로 쌀가게를 인수받음. 이 때 나이가 22세.
· 잠시 자동차 수리업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47년 현대건설을 창업한 것부터임.
·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내사회간접시설을 일으키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에 뛰어들었고 성실성과 신용을 인정받게 되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함.
(00:07:30~00:10:40)
3. “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하다”
· 62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됨.
· 공업화에 의한 자립경제구축과 수출입국이 목표로 정해짐.
·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 공사를 착공하며 현대건설을 국내1위 자리로 올려놓음.
· 사회간접시설 건설과 시멘트 공장, 포항제철소 등 국가기관 산업건설에 민간기업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.
· 65년 첫 해외 건설 진출.
·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진행하였고 괌에서 주택건설사업, 월남에서 항만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함.
· 68년 경부고속도로를 2년 5개월 만에 완공.
(00:10:40~00:15:10)
4. “세계시장에 진출하다”
· 태국을 시작으로 베트남, 호주, 인도네시아를 거쳐 중동에서 대형건설공사를 잇따라 수주하면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 제공.
· 사우디 쥬베일산업항 공사. 20세기 최대의 공사를 성공리에 완공시킴.
· 외환위기 해소 계기를 마련하며 한국경제의 비약적인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.
·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미포만 사진 한 장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차관을 하러감.
· 배를 만든 경험이 없던 은행에게 거액의 차관을 내줄 은행을 찾긴 어려웠지만 영국의 버클리 은행을 설득함.
· 버클리 은행은 배를 사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증명을 가져와야 차관을 하겠다고 제안.
· 그 시기에 그리스 선주가 값싼 배를 구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고 결국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.
·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드는 획기적인 전략 구상.
(00:15:10~00:18:14)
5. “엑셀 신화를 창조하다”
· 정주영은 전국 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며 민간주도 경제와 시장경제원리를 조장하며 한국기업이 나아가할 방안과 역할을 제시함.
· 자동차산업이 기계공업의 꽃으로 앞으로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고 예상했었음.
· 현대자동차는 66년 미국 포드사와 자동차조립생산계획을 맺고 합작호사형태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.
· 그러나 머지않아 포드사와 결별하고 국산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.
· 이러한 결심의 이유는 국산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우리나라 기계공업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에.
· 최초의 국산모델 ‘포니’ 출시
· 자체기술과 고유모델개발에 힘쓴 현대자동차는 89년 국내 최초로 미국에 진출.
· 미국에 진출한 현대자동차 고유모델 ‘엑셀’은 4개월 만에 52400대가 팔림.
· 87년 미국시장 수입소형차 판매1위를 차지함.
(00:18:14~00:21:03)
6. “첨단산업에 진출하다”
· 미래에는 첨단전자산업이 지배하며 현대의 주력분야인 자동차, 조선, 기계분야에서도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첨단전자의 기술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판단.
· 83년 현대전자 설립. 해마다 고도성장을 계속해 창립 10년도 되지 않을 때 세계적인 반도체업체가 됨.
· 해외지향적인 수출위주의 산업전자를 전문화하여 이룩한 성과.
· 현대전자는 산업전자부문에서 최단기간에 성과를 이루어 냄.
· 80년대 말부터 정보산업에 뛰어듦.
· 92년 64메가디렘을 개발. 95년 256메가디렘 개발 성공.
· 광통신시스템 개발 등이 현대전자가 추진해 나갈 또 다른 사업 분야
· 미국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버 업체를 인수했고 총 13억을 들여 반도체 공장도 짓고 있는 중.
· 90년대 들어서 전자분야뿐만 아니라 자동차, 기계, 조선 등에서도 비약적인 성과를 얻음.
· 매출액의 10%를 기술개발에 쏟고 있음.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만이 미래에 살아남는다고 판단. 20여개의 연구소 보유.
(00:21:03~00:24:35)
7. “웅대한 꿈을 품고”
· 일등 농사꾼이 되기를 원했던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음.
· 80년대 초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착수함.
· 한국인이 필요한 것은 좁은 영토를 확장시키고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라고 판단.
· 물막이 공사가 난항이었지만 유조선으로 바다를 막아 세계를 놀라게 만듦.
· 옥토에서 연간 4000만kg의 쌀을 만들어 내는 일등 농사꾼의 꿈을 실현함.
· 또 다른 꿈은 남북통일. 89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땅을 방문.
· 금강산개발과 원산의 철도차량공장을 짓는 것을 북한과 합의하고 돌아옴.
· 북한에 다녀오고 나서 90년 6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남.
· 정주영이 소련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2가지인데 첫 번째, 시베리아 목재와 천연가스 등 무한한 자원 보고에 대한 개발의 꿈으로 인해, 한국에 없는 자원에 안정적인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 국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두 번째는 소련의 영향력으로 남북통일의 지름길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인해.
(00:24:35~00:26:46)
8. “이 땅에 태어나서”
· 98년 인생회고록인 “이 땅에 태어나서”를 발간.
· 정주영은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고 함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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